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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어른 68회 설민석] 2017년 식史를 합시다. 3탄. 통일 신라.

신라가 발전이 가장 느렸던 이유.
태백산맥과 소백산맥 사이에 쌓여있어 문물을 받아들이기 힘들었고,
왜의 잦은 침입과 안으로는 엄청난 모순인 골품제가 있었다.
기회조차 주지 않는 나라였다. 관직뿐만 아니라 의복 및 생활까지 골품제로 규제했으니까.
하지만 비록 시작은 미약하였으나 그것을 극복하고 딛고 일어나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최초의 삼국통일을 이룬 신라. 그 힘의 원천을 깨닫고 배운다면 그 어느 나라도 부럽지 않다.
그럼 신라의 통일의 비밀은 무엇일까? 바로 외교와 교육이었다. 지덕체 강조한 교육. 화랑의 존재.
현재 우리나라는 지식에 치우쳐 덕과 체가 부족한 교육을 하고 있다.
설민석 선생님이 고등학교 시절 덕을 배운 이야기를 해줬다.
피라미드 게임을 통해 배운 '덕'. 맨 밑에 깔려보고서는 죽음을 경험했다고 한다. 
그때 선생님이 했던 말.
"너희가 이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에 나가서 각 분야의 리더로 성장하게 될 텐데.
맨 윗사람의 마음만 알 것이 아니라 맨 아래에 깔린 사람의 마음도 알아야 한다.
윗사람이 재채기하면 아랫사람은 감기가 걸린다.
너희들이 리더가 되고 성장할수록 겸손하게 몸을 낮추고 아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사려라."
그 말이 뇌리에 꽂혀 30년이 지난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다고 한다. 그래서 아무리 신입직원이라도 말을 놓지 않으신다고. 말이 낮아지면 행동도 낮아질까 봐. 이게 바로 우리가 갖춰야 할 덕이 아닐까.   

6세기 진흥왕 때부터 신라의 외교술이 시행됐다. 그리고 그 이후 삼국 중에 가장 최약체였던 신라는 외교술을 펼치기 시작했다. 그 외교술로 당나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다.
이때 신라와 당나라의 동맹 조건은 당이 군사를 지원해주는 대신 대동강 이북 땅은 중국이 가져가기로 했는데 당나라가 신라까지 넘보기 시작한 것이다. 신라가 선택할 수 있는 카드는 두 장뿐이었다.
무릎 꿇거나, 맞서 싸우거나. 그 안건을 가지고 화백회의 때 회의를 하게 되는데, 아무리 거인이지만 계속되는 전쟁으로 거인도 지쳐있다. 그러니 해볼만하다는 결론이 나왔다.
그래서 신라는 멸망 후 저항하던 백제, 고구려 유민들을 불러 설득해 연합군을 결성한다. 그리고는 당나라를 거세게 내몰아 당나라에 먹히지 않았다. 우리의 교과서에 보면 신라 통일의 의의와 한계가 나온다.
한계는 대동강 땅을 잃은 것과 외세를 끌어들인 것이라고 나와있는데. 그렇다고 신라를 얍삽하다고 볼 수 있을까?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입장에서 본 시각이다.
그 당시 삼국 중 최약체인 신라의 입장에서는 '신의 한 수' 였을 것이다.
"강한 자가 이기는 것이 아니라 이긴 자가 강한 것."
이것은 비단 신라뿐만이 아니다. 세계로 눈을 돌려보면 태국이 그렇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일본의 지배를 유일하게 피한 태국.
외교술을 통해 일본의 무상 주둔과 통행 허락해 공수동맹 체결한다. 그래서 독립국으로 인정받는다.
흔들리기는 하되 부러지지는 않는다. 국가와 국민을 지켜야 한다는 본질.
이것이 바로 국민을 최우선으로 한 실리외교다.

무열왕 김춘추는 신분에 약점이 있었던 사람이었다.
성골이 아닌 진골 출신이었던 것이다.
헌데 선덕여왕, 진덕여왕 이후 성골에 남자, 여자가 아무도 없으니, 그의 능력과 태생을 인정받아
왕으로 추대 받게 된다. 그도 성골의 피가 반은 흐르고 있었기에.
신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트라우마를 앉고 있던 왕이었다.
무열왕 하면 빼놓을 수 없는 김유신 장군. 이 분도 진골 출신이었다. 금관가야 구해왕의 후손으로
신라에 항복을 하면서 진골이 된 경우였다. 같은 진골이라도 상대적으로 인정받지 못 했던 김유신.
이 유리천장을 깨고자 했던 김유신.
무열왕과 김유신. 상대적으로 별 볼일 없는 사람들의 별 볼 일 있는 이야기.
그리고 무열왕의 아들 문무왕. 문과 무를 모두 갖춘 왕이라는 뜻.
그가 삼국통일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그의 뒤를 이은 무열왕의 손자이자 문무왕의 아들. 신문왕.
왕권 강화하면 떠오르는 신문왕. 하지만 이 분도 세종대왕 못지않은 업적을 가진 왕이었다.
하지만 우리에게 그만큼 알려지지 않은 이유는 조선왕조실록처럼 기록이 많이 없기 때문이다.
그럼 그가 그토록 왕권 강화를 하려고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즉위 한지 얼마 되지 않아 장인인 김흠돌의 난이 일어나기 때문이다.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아 난의 이유는 정확하게 알 수 없다. 추측만 할 뿐.
이런 위기 덕분에 문무왕에게 물려받은 14k 금을 24k 금으로 발전시킬 수 있지 않았을까?
이 난으로 인해 왕권 강화 계기의 명분을 잘 살릴 수 있었다. 
이처럼 개인이나 국가에 찾아오는 시련을 잘 이용하면 기회로 삼아 우리의 힘을 더 강화시킬 수 있다.

그리고 신문왕은 초심유지한 왕이었다.
태자 시절 편안하기만 했다면 어느 정도 자리가 잡혔을 때쯤은 흥청망청했을 수도 있었을 텐데.
그의 태자 시절은 고생 그 자체였다. 태자 시절 16년. 재위 기간 12년. 재위 기간보다 길었던 태자 시절.
그 기간 동안 아버지인 문무왕을 따라 수도 없이 전쟁터를 누비고 다녔다. 기록은 없지만 추정으로 충분히 알 수 있다. 그곳에서 병에 걸려 신음하고, 배고픔에 오열하는 백성들. 엄마의 시신 앞에서 젖 달라고 울며 보채는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심장이 찢어지는 아픔을 느꼈을 것이다.
그러니 그렇게 힘들게 얻은 통일을 어찌 함부로 생각할 수 있었겠는가.
그는 백성들의 아픔을 보살피고자 백성과 더불어 살아가기 위해 노력하는 왕이었다.

우리들의 새해 결심은 어떤가? 작심삼일이 되기 쉽지 않은가. 그건 사람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신문왕도 이렇게 초심을 잃을까 두려워했다. 자기 자신을 제어하기 위해 제어장치로 활용했던 것이 바로
충신은 가까이, 간신은 멀리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청을 중요시했다. 신문왕의 경청에 대한 일화가 있다. 어느 날 원효대사의 아들 설총이 직접 지은 이야기를 신문왕에게 들려준다.
이것이 바로 오늘날까지 전해 내려오는 화왕계라는 글이다.
꽃의 왕인 모란 꽃 옆에 장미꽃과 할미꽃이 있는데. 장미꽃은 달콤한 꿀같은 이야기, 아첨하는 이야기를 하고, 백두옹인 할미꽃은 옆에서 쓴소리를 한다. 듣기 싫어하는 왕이었다면 말에 가시가 있다며 듣기 싫다고 내쳤을 텐데. 신문왕은 오히려 설총을 칭찬했다. 그리고 그의 말대로 간신을 멀리하고 충신을 가까이 했다. 그뿐만 아니라 그 이야기를 후손들도 볼 수 있게 글로 남기라고 명했다.   

그리고 그는 고구려, 백제 유민들을 통합하려 했다.
그러기 위해 지방행정구역을 개편한다. 9주로 전국을 나눈다. 옛 고구려 지역 3주, 옛 백제 지역 3주, 그리고 신라 지역도 똑같이 3주. 차별감, 위화감을 덜고자 했던 마음이 지방행정구역 개편에서 드러난다.

이뿐만이 아니다. 군사 조직도 재편성하는데. 국왕의 직속부대인 9서당에 출신 차별 없이 등용을 한다.
고구려, 백제, 말갈족까지. 출신이 꿈을 가로막지 않도록. 이제는 하나 된 통일신라의 백성이기에.
"나를 잘 지켜줘. 나는 이 나라의 백성을 보살필게."
차별하지 않는 마음. 이것이 바로 진정한 강자의 미덕.

위인이 될 유전자라서 이런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걸까?
아니다. 실제 신문왕은 겁쟁이었다. 두려워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 마음이 고스란히 기록으로 남아있다. 문무왕에게 바친 제문에.

하지만 절망하지 않고 두려움을 극복하고 훌륭한 왕이 되었다.
그런 점에서 우리에게 귀감이 되는 신문왕.

만파식적 고사. 문무왕이 용왕이 되어 선물한 대나무로 만든 전설의 피리. 
이 피리에 담긴 신문왕의 마음을 보면 왕권 강화의 의미와 평화를 염원하는 호국 정신이 담겨있는 피리라고 볼 수 있다.

나라가 발전하면 문화도 따라서 발전하게 된다.
이 시대에 발전한 문화. 신라의 위대한 유물인 '불국사'가 바로 그것이다.
창건 설화를 보면 김대성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가난을 한탄하며 스님에게 시주를 했고, 얼마 후 김대성이 죽는다. 그리고 재상 김문량의 집에 아이가 태어나니, 이가 바로 김대성이었다. 부잣집으로 다시 태어나게 해 준 것이다. 전생을 기억한 김대성은 전생의 부모와 현생의 부모를 함께 모셨다.
그리고 집사부의 시중이 된 김대성. 오늘 날로 따지면 비서실장.
그는 그 힘으로 부처님의 나라를 건설해 보겠다는 생각을 품는다. 그래서 불국사가 창건되게 된다.
자신의 현생의 부모를 기리며 세운 불국사. 전생의 부모를 위해 지은 석굴암.
그렇게 부처님의 나라를 구현한 불국사.

석가모니가 있는 대웅전 앞에 석가탑, 다보탑이 있다.
이 중 석가탑이 60년대 도굴범들에 의해 도굴이 되면서, 탑을 보수하는 과정에서 무언가 발견하게 된다.
사리함과 두루마리. 그 두루마리가 바로 세계 최고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대다라니경'인 것이다.
이렇게 우연히 발견된 우리의 위대한 유산!
하지만 중국의 방해로 유네스코에 등재가 되지 못하고 있다.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가 만든 한자가 사용되었으니, 이건 자신들의 조상이 써서 너희에게 선물로 준 것이다. 이렇게 우기고 있다. 여기에 일본까지 합세해서 반대하고 있다.
현재 가장 오래된 목판 인쇄물이 일본의 백만탑다리니경이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목판 인쇄술이 등재되면 2등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직도 논란 중인 유물이다.
아픔은 이뿐만이 아니다. 석가탑과 나란히 있는 다보탑에도 아픔이 서려있다. 법화경에 보면 석가모니가 중생들에게 설파를 할 때 다보불이 같이 나타나 석가모니의 말이 진리임을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확인시켜 주고 검증시켜주는 분이 다보불이다. 그 모습을 형상화 한 것이 바로 다보탑.
10원짜리에 새겨져 있는 바로 그 다보탑. 하지만 다보탑의 4마리 사자 중 3마리가 없어지고, 남아있는 한 마리의 사자마저 입이 망가져 있다. 누구의 소행인지는 단정 지을 수는 없으나, 심증적으로 추측은 충분히 해 볼 수 있다.

그렇다면 이렇게 잘 나가던 신라는 왜 멸망하게 됐을까?
진성여왕 때 망조의 길을 걷게 된다. 진성여왕 여자라서 능력이 부족해서일까? 아니다. 개인적 소양 부족했기 때문이다. 즉위 직후엔 열심히 하려고 노력했으나 심적으로 의지하던 위홍의 죽음으로 소위 말해 멘붕이 오게 되고, 그때부터 향락의 길을 걷는다. 미소년들을 가까이하며..
그리고 이때 최초로 농민들의 난이 일어나게 된다.
무능, 타락, 향락이 이런 끔찍한 상황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렇다면 신라 말기의 문화는?
향락을 보여주는 증거들이 남아있다.
전복같이 생겼다 하여 이름 붙여진 포석정.
오늘날의 회전초밥처럼 물 위에 술잔을 올려 돌려마시는 유흥의 장소였다.
그리고 목제주령구 주사위. 현재 원본은 없고 복제본만 있지만 오늘날의 원샷 문화의 시작 유물이라고 봐도 무방한 유물이다.

수도였던 경주에는 초가집이 하나도 없었다. 경주만 잘 살았던 것이다.
기록에 의하면 기와집이 끝이 보이지 않을 만큼 이어져 있었고, 피리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귀족들은 섬을 사서 목장을 소유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렇게 신라는 향락에 빠져 화려한 전성기를 보냈지만 결국 멸망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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