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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다 어른 67회 설민석] 2017년 식史를 합시다. 삼국시대편.

저번 주에 이어! 설민석의 식사를 합시다. 2탄!! 삼국시대 편. 내가 좋아하는 왕국의 시작이다.
내가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삼국시대인데 역시 설민석 선생님의 강의는 감탄을 자아내게 만든다.
우리나라 역사의 자긍심을 심어주시는 설민석 선생님!
너무 감동을 받다 보니... 포스팅이 엄청나게 길어질 것 같다... ^^;;;

우리의 중심 철수 김상중님.. 시작에 항상 좋은 멘트들을 날려주시는데.
오늘 멘트는 더욱이 마음에 들어서 캡처해본다.

"우리는 힘을 내기 위해서 밥을 먹고, 용기를 내기 위해서 마음을 먹고
어른이 되기 위해서 나이를 먹는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삼국이 전하는 3가지 교훈이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

일단 삼국시대가 생기게 된 배경부터 알아보기 위해 고조선 시대로 올라간다.
한나라로부터 공격을 받게 된 고조선.

당시 기록에는 고조선이 성공적으로 막아냈다라고 나와있다.
그런데!!
1년 정도 항전하다 보니 내분이 벌어지게 된다.

이 내분 때문에 망한 나라가 바로 고조선이다.
이것은 비단 고조선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절대 무너질 것 같지 않았던 철옹성 고구려도
국론의 분열과 지배층의 내분으로 멸망했다.
백제도 의자왕의 향락으로 나라가 망하니,
지배층의 사치와 향락과 내부 분열은 곧, 나라를 망하게 한다는 교훈을 얻을 수 있다. 

자! 그럼 본격적으로 삼국시대로 들어가 보자.
고조선 영역에 4개의 군현을 설치한 한나라.
낙랑, 임둔, 진번, 현도로 나눠 다스렸다.
이때 우리 민족들이 새로운 나라들을 세우는데 이 나라들이 합쳐지면서 세 나라로 형성되게 된다.
바로 고구려, 백제, 신라. 그리고 백제와 신라 사이의 가야라는 나라가 있었다.
그렇다면 왜 사국시대라고 하지 않을까?

먼저 고대국가가 되려면 성립 조건 4가지가 있다.
세습을 통한 왕권 강화, 불교 수용으로 사상 통합, 율령 반포, 영토 확장.

그 시대의 최고의 무기 "철"이 풍부했던 가야.
지금으로 따지자면 아이언맨 수트를 발명했던 가야.
하지만 단합하지 못한 채 6가야로 나눠져있었기 때문에 고대국가로 발전하지 못 했다.

철기문화는 발전했지만 정치적 단결이 부족했던 가야.
여기서 우리는 단결의 중요성을 알 수 있다.
나라를 발전시키는 힘은 단결이라는 것을.
가야를 설명하면서 마무리까지 완벽한 설민석. 최고다.

삼국시대 중 먼저 고구려.
고구려 하면 용맹함이 떠오른다.
그들을 왜 그런 이미지로 자리 잡았을까? 아마 환경의 영향이 크지 않았을까? 
대부분이 산지였던 고구려의 지리적 특성으로 농사가 힘들어 궁핍했던 백성들.
고구려는 배고팠다. 먹고 살 수가 없었다.
그래도 처자식을 굶길 수는 없으니 이웃나라에 쳐들어가서 물건을 빼앗거나(옥저, 동예 등)
그 나라를 반 속국으로 만들어서 조공을 받는 약탈경제가 발달했다.

그리고 우리나라에 태극기가 있듯 고구려도 고구려를 상징하는 깃발이 있었는데
바로 그것이 '삼족오' 다.
태양 안에 사는 전설의 새 '삼족오'를 상징물로 사용했다. 태양의 후예는 바로 고구려인!

그럼 그들의 결혼 풍습을 보자.
용맹하지만 여자에게는 한없이 약한 츤데레 같은 남자들이 바로 고구려 남자들이었다.
연애결혼을 했던 고구려.
그리고 고구려에서는 결혼을 하면 남자가 처가에 들어와서 사는 데릴사위제. 서옥제가 있었다.

고구려 사람들은 결혼을 할 때 신랑 측으로부터 혼수를 거의 받지 않았다.
술 한 병에 돼지고기 정도만 받았지 그 이상은 받지 않았다.

실제 결혼은 사람과 사람의 사랑으로 하는 것이지
그깟 돌댕이 다이아몬드. 구석기 시대에 주먹도끼보다 못한! 것이 중요한 게 아니다 라는..
뭣이 중헌디!!! 라는 재치 만점 센스까지 ㅋㅋㅋㅋ

그렇다면 고구려인에게 부의 기준은?
바로 노동력! 중심의 사회였다.

이것이 데릴사위제인 서옥제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자녀를 낳고 자녀가 성장 후에 남편집으로 가게 된다. 
츤데레 고구려 남자.

그리고 부여의 영향을 받은 형사취수제라는 결혼 풍습.
부여의 결혼제도다.
형이 죽으면 형수를 취한다는 결혼 풍습.
이것과 관련해서 우씨 왕후의 재미난(?) 이야기가 있다.

자칮 오해를 부를 수 있는 부여의 결혼 풍습.
여러 가지 의미가 있다.
옛날에는 최고의 재화는 노동력이었다.
여자도 노동력에 포함시켜 본 것이다.
만약 다른 집에 시집을 가거나 친정으로 돌아가면 집안 재산이 없어지는 것으로 생각했다. 
재산을 지킬 목적과 또 남겨진 형수와 조카들을 나몰라라 할 수 없으니 내가 보호하겠소라며
보호자를 자처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고구려 왕 하면 광개토대왕과 그의 아들 장수왕이 유명하다.
광활한 땅을 열다라는 뜻이 광개토 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광개토대왕의 시호는 국강상광개토평안호태왕 이라고 한다.
처음 알았다.. 되게 길다..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끈 광개토대왕!
하지만 그건 조상의 음덕 덕분이었다.
성군이었던 세종의 뒤에 태종이 있었던 것처럼, 광개토 대왕의 뒤에는 삼촌이 있었다.

그 삼촌이 바로 소수림왕!

고구려 주몽의 아들 온조가 남하해 세운 나라 백제.
고구려에서 나온 나라이자 고구려 아들의 나라 격인 백제.
근데 4세기 백제 13대 임금인 근초고왕이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한다.
그래서 고구려의 왕 고국원앙을 죽인다.
그 왕의 아들이 바로 소수림왕이었다.
내 아버지가 동맹국에게 죽었다면? 바로 쳐들어가지 않겠는가.
하지만 소수림왕은 그렇게 하지 않았다.
이유는 아직은 칼을 뽑을 때가 아니다라고 생각한 것이다.
쇠퇴한 국력에 엎친 데 덮친 격으로 흉년까지 들어서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을 정도로 기근이 심했다.

물론 가슴은 불타지만 이런 복수심에 나의 군인들과 백성들을 일으켜서 백제를 친다는 건
너무나 무모하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냉철한 판단을 했던 소수림왕.
그렇게 최대한 자신을 낮추고, 후대에서 복수를 할 수 있도록 국가 내실을 다진 사람.
소수림왕의 국가 위기 극복방안을 보면 중국으로부터 불교를 수용해 마음을 가라앉히고,
국민들의 정신적 통일을 이룬다.
그리고 국가 통치의 기본인 법. 율령을 반포한다.
역사 속 성군들을 보면 교육발전에 힘쓴 걸 알 수 있다.
소수림왕 또한 교육발전에 힘쓰는데, 태학이라는 국립 대학을 만든다.
이렇게 차근차근 강한 나라로 발전시킨다.
그렇게 준비한 복수의 칼날을 조카에게 넘긴다.
그 조카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소수림왕이 닦아놓은 나라에서 선대 왕의 복수를 계획하고 백제로 쳐들어가는데!   
아리수(한강)을 건너 맹렬히 공격한다. 결국 항복한 백제의 아신왕.
백제의 왕이 무릎을 꿇고 노객이 되겠다고 한다.
그렇게 선대 왕을 위한 복수에 성공한다.
"너 까불면 안 돼!"라고 경고 한 뒤, 돌아가서 북쪽으로 영토를 넓힌 광개토 대왕.

우리가 고구려를 좋아하는 이유!

영토를 확장한 광개토 대왕! 그렇다면 땅이 넓으면 좋을까?
반란도 막아야 하지, 세금도 걷어야 하지, 복지도 해줘야 한다.
신경 써야 할 게 산더미다. 그러므로 무조건 땅을 넓히는 게 능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광개토 대왕은 국익에 도움이 되는 곳에만 진출한다.

그들의 영토의 대부분이 산지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이 가장 필요했던 건 바로 소금!
소금이 귀했던 고구려. 그래서 소금 산지 쪽으로 영토를 확장한다.
염수가 흐르는 강을 위주로.
그리고 또 하나. 요동반도로 진출한 이유는 중국의 최고 무역항인 산둥반도와 가까워서.
바로 바닷길을 열기 위해. 한마디로 무역을 위해 진출한 것.
철광석 산지로도 진출했다. 무기를 만들어야 하니까.
이렇게 광개토대왕은 보여주기 식 영토 확장이 아닌 실제 국익에 도움이 되는 지역에만 군사를 보낸
용의주도한 분이었다.

나도 가장 궁금했던 것! 설민석 선생님은 이 모든 걸 어떻게 알고 있을까?
그것은 바로 광개토대왕의 아들인 장수왕 덕분이라고 했다.
자신의 아버지 업적을 기리기 위해 세운 광개토대왕릉비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비석에 고구려의 건국, 광개토대왕의 업적, 묘 관리와 관련된 내용을 세세하게 기록해 놨다.
그렇지만 오랜 세월이 흘러 철저하게 이 비석은 버려지게 되고, 이끼가 돋아나고, 잡초가 감싸져 있었다.
1880년대에 누군가가 이 비석을 발견해 탁본을 떠서 알리게 되는데, 하필이면 일본 군인이었다.
이렇게 우리나라 고대사 연구 중 일부가 일제 식민사관을 통해 진행이 됐다.   
안타까운 일이다.
위치는 중국에 연구는 일본에 의해서 진행됐다는 점이.

하지만 비극은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조선 지배를 위해서 비문 내용을 왜곡한다.

일본부를 설치한 뒤 거기 있던 백제, 신라, 가야를 격파한 뒤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설.
<일본서기>에 기록되어있다.   
그 근거가 광개토대왕릉비에 있다.라고 주장한다.

바다 건너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격파했다는 것.
가운데 비어있는 글자는 훼손되어 알아볼 수 없는 글자.
거기에 <가야 진>이라는 단어를 넣어 해석한다.
백제와, 가야, 신라를 신하로 삼았다고.
이것이 임나일본부설 아니냐 이렇게 주장을 한다.

우리나라 역사학자들이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이놈들아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냐."
우리 민족의 얼을 강조하신 위당 정인보 선생은 새로운 해석을 내놓는다.

주어를 고구려로 바꾼다.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오는 걸 고구려가 막았다.
그리고 고구려가 주체가 돼서 백제와 신라, 가야를 지배했다.   
정반대의 이야기가 된다. 주어만 바꿨을 뿐인데.

그럼 생각을 해보자. 이 비문은 광개토 대왕의 아들 장수왕이 만든 것이다.
아버지의 업적을 기리는 비석에 설사 일본이 그랬다 하더라도
그 내용을 빼면 뺐지 그걸 비석에 왜 쓰겠는가.

대한민국 국민으로서가 아니라 누가 보나 정인보 선생의 해석이 타당하다.
일본의 학자들도 동의해서 일본의 임나일본부설을 허구라 인정하고
용어를 쓰지 않기로 양국 사학자 간에 합의를 했다

그렇게 잊히는 듯했었는데..
일본의 아베가 다시 재주장을 한 것이다.

일본 청소년들이 역사를 왜곡해서 배우고 있다.
2016년부터 일본 초등학생, 중학생들이 독도를 자기네 땅이라고 배운다.
우리가 군사력을 이용해 불법으로 점령하고 있다고 작년부터 배우고 있다.

그러면서 여기 있는 임나일본부설까지 뒤엎으려는 의도가 일본 교과서에 보이고 있다.

이것은 일본이 4세기에 한반도 남부를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기
위한 포석이라고 밖에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부분이다.
가야 시절 유물에 일본 문화청 홈페이지에 임나라는 말을 함부로 붙여놓는 것을 봤을 때
아직도 역사전쟁을 끝나지 않았구나.
총성 없는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우리가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바로 역사에 대해 깨어나는 것이다.
깨어나야 한다!

지난 시간에 배웠던 '주먹도끼' 또한 우리가 알기 전에는 그냥 돌멩이에 불과했다.
하지만 알고 나니 다이아몬드보다 더 귀한 존재임을 알 수 있었다.
전 세계 구석기 시대의 학설을 뒤집은 주먹도끼였으니까.
이렇게 역사는 아는 만큼 보인다.
역사를 바로 아는 것 또한 일종의 애국이다.
그런 의미에서 애국 계몽운동에 앞장서고 계시는 설민석 선생님께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우리 역사가 어떻게 왜곡되는지를 제대로 알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머리는 아니더라도 가슴에는 새겨야 하지 않을까?

다시 고구려로 돌아와서.
고구려의 전성기는 5세기 장수왕 때 절정을 이루게 된다.
아버지는 북쪽을 점령했으니, 나는 남쪽에 대한 정벌을 해야겠다.
그래서 계획된 남진정책. 국내성에서 평양을 수도를 옮긴다. 이것이 바로 평양 천도.
여기까지 학교에서 배운 내용이다.
장수왕 남진정책. 장수왕 평양 천도. 5세기. 그래서 신라와 백제는 나제동맹을 맺었다.
여기까지는 지식이다.

그럼 여기서 우리가 배울 점은?
그러려면 장수왕이 수도를 천도하고 백제를 공격하는데 얼마나 준비를 했는가를 알아야 한다.
장수왕이 즉위를 하고 수도를 옮기는 데만 15년이 걸렸고,
백제를 공격한 게 장수왕 즉위 후 63년 후였다.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용의주도함 과 오래 살았구나!

재위 기간만 413~491이라고 한다.

역대 왕중에 1. 그래서 장수왕.
조선 시대 장수한 왕 영조도 83세였다.
그런데 왕이 이렇게 지나지게 오래 살면 자식들이 힘들다.
왕위를 물려주기 전에 아들이 사망했기 때문이다.
장수왕 다음 왕은 손자 문자명왕.

다른 나라의 왕은 수도 없이 바뀌는데.. 고구려는 그 기간 동안 장수왕 혼자 통치하게 된다. ㅋㅋ

바로 백년지대계!

백년지대계의 모범인 고구려.

때를 기다린 소수림왕.

그리고 국민들의 목숨, 나라의 흥망성쇠를 담보를 하는 전쟁을 함부로 할 수 없어
60년 이상의 시간을 들였던 장수왕.
그리곤 정확하게 성공해 한강유역을 완벽하게 차지했던 장수왕.
이런 점을 배워야 하지 않을까?

그럼 고구려를 봤으니 두 번째 나라 백제!
우리에게 생소한 나라 백제.
고구려는 광활한 영토로 우리에게 알려져 있고, 신라는 통일을 한 국가다 보니 기록이 굉장히 많다.
그런데 백제는 이도 저도 아니니 우리에게 낯설 수밖에
그래서 설민석 선생님께서 백제를 부활시켜 주시기로 했다!

백제의 여러 가지 면중에서 주목해야 될 키워드는 바로 <문화 예술 강국>

바다로 둘러싸인 백제.
문물을 수용하고 전해주기에 아주 좋은 요건이었다.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이고, 그것을 재창조에서 일본에 전파했던 나라.
우리나라 최초의 한류열풍의 시작이라고 볼 수 있는 백제.
글로벌한 국가였다.
군사력도 막강해서 고구려의 왕을 죽이기도 했다.
그러나 문화적 융성을 꿈꾼 근초고왕.

돈독한 관계를 위해 왜에 선물을 보낸다.
말을 선물하는데 따라간 마부가 바로 아직기.
당시 글을 몰랐던 왜인에게 한자를 알려준 아직기.
"아직도 글자를 모르세요? 아직기." - 학생용 맞춤형 강의!! ㅋㅋㅋㅋㅋㅋ
뒤이어 왜에 간 왕인. 천자문, 논어를 전해준다.
"왕 대접을 받은 왕인" - 이것도 학생용. ㅋㅋ
그리고 6세기 성왕 때 노리사치계가 일본에 불교를 전파한다.
글자와 책도 받았으니, 이제는 종교 하나 받아야 되지 않겠나?
"불교는 사치일수도 ~ 노리사치계" 

근초고왕 아들 근구수왕 때 칠지도를 하사한다.
가지가 7개 달린 칼 칠지도.
그런데 문제는 이것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생각하는 일본인들이 있다는 것이다.

"백제는 우리에게 칼을 상납했어. 너희는 왜의 속국이었어"라고 주장한다.
 
그런데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칼을 누가 윗사람에게 선물한단 말인가.
칼은 윗사람이 아랫사람한테 선물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상납이 아닌 하사인 것이다.

이렇게 백제는 왜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문화 전파의 예는 무궁무진하다.
그런데 문화 예술 강국이었던 백제가 어떻게 망하게 될까?
7세기 의자왕 때.
너무 놀다 지쳐 의자에 앉아 쉬어서 의자왕??
안 그랬다. 의롭고 '의' 자애로운 '자'. 그는 성군이었다.
3천 궁녀는 거짓이다.
조선시대 문인 민제인이 많다는 느낌을 주고자 궁녀 수 3천으로 비유한 것일 뿐이다.
 
의자왕은 신라의 40여 개 성을 뺏으며 활발히 정복활동을 하던 사람이다.
하지만 초심을 잃고 술과 향락에 찌들다가 결국 나당 연합군에 패하게 되면서 백제는 망하게 된다.
   
백제의 교훈!
찬란한 백제 문화 일본 고대 문화의 불씨가 되다.

마지막으로 신라.
만들어지기는 제일 먼저 만들어졌지만, 발전은 가장 느렸다.
그 이유는 바로 다음 시간에!!!